1. 성경공부 목적
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목적이 한 가정에 있다. 가정이 이처럼 중요한 이유는 생명의 창조와 양육이 가정에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곳이 가정이다. 따라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께서 첫 행적으로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의 기초를 이루는 율법서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곧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도 가정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벨론 포로경험을 통해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운동을 통하여 오늘의 유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는 가정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말았다.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겨야한다. 오늘 우리 기독교에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첫 행적으로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의 기초를 이루는 율법서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곧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도 가정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벨론 포로경험을 통해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운동을 통하여 오늘의 유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는 가정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말았다.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정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겨야한다. 오늘 우리 기독교에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2. 성경공부 특징
가정성경공부를 강조하는 신명기의 교육강령인 쉐마(6:4~9)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부모가 먼저 성경을 공부하여 마음에 깊이 새겨야(깨달아야)한다.
- 부모가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며 자녀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친다.
- 자녀/가족이 함께 성경 본문을 읽고 내용에 대해 질문/토론으로 진행한다.
3. 성경공부 진행
왜 질문 토론식인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성경공부는 질문/토론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성경공부는 고대 이스라엘 문서이며 운문으로 구성되어 질문/토론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거나 가르치다 보면 의문 투성인 구절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고 대답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 사고력,상상력,창의력, 논리력 교육의 지름길이다.
성경은 은폐/함축/암시의 방식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본문에 대하여 질문하며 토론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사고력, 상상력, 창의력, 논리력 훈련이 된다. - 최고의 교육방법이다.
최고의 교육방법이 질문 /토론식인 것은 다 아는 방식이다. 전달/주입/정리/암기식 방식은 차선책에 불과하다. -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한다.
부모가 답을 말해주지 않고 자녀들이 답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 사물의 원리와 이치, 근본에 도달하게 된다.
질문과 토론을 계속하다보면 생활전반에 대한 문제는 물론 궁극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되는데 성경은 고대문서이면서 근본을 담고 있기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지침서는 없다. - 새로운 야브네 운동
주후 70년경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하기 직전에 유대인이 지도자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어머니들을 성전 앞으로 모아놓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들이여 비록 예루살렘이 망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가슴과 입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자녀들의 가슴에 전해지는 한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그 후 죽음의 위협을 받던 그는 관속에 숨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가 로마군 총사령관인 베스파니아누스를 만납니다.
주후 70년경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하기 직전에 유대인이 지도자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어머니들을 성전 앞으로 모아놓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들이여 비록 예루살렘이 망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가슴과 입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자녀들의 가슴에 전해지는 한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그 후 죽음의 위협을 받던 그는 관속에 숨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가 로마군 총사령관인 베스파니아누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를 황제라고 부르며 무릎을 끓고 눈물로 사정했습니다. 황제 폐하 예루살렘성을 파괴하고 성전을 파괴해도 좋지만 오직 야브네(얌미아)만큼은 파괴하지 말아주십시오. 간청드립니다.
그가 왜 그랬을까요?
얌미야는 이스라엘의 회당이 있고 랍비들이 사는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스파니아누스는 자기를 황제라고 불러주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게 여겨 벤 자카이말처럼 암나아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망했지만 여전리 야브네(얌니아)는 존재하였습니다.
랍비들이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녀들에게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1948년 드디어 세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토에 돌아와 다시 나라를 세웠을 때 세계 각국에서 살아가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모였지만 놀랍게도 음식, 문화, 언어, 신앙이 다 똑같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그들도 말씀교육의 중요성을 그토록 잘 알았다면 하물며 우리 기독교인들이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잘 감당했지만 자녀와 후손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의 전성기를 누렸던 로마, 유럽, 미국도 200년 내외로 복음의 꽃을 피우다가 쇠퇴기를 맞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겨우 100년을 넘어서 쇠퇴기를 맞고 있습니다.
1970년대 한국 기독교는 어른보다 어린이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부터 주일학교 숫자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노년과 장년층에 비해 청소년과 주일학교 학생이 급감하는 가분수 현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전혀 새로운 제2의 야브네(얌니아) 운동을 펼쳐야 할 때입니다.
교회마다 목회프로그램과 시스템을 최우선적으로 가정 성경공부에 집중해야합니다. 벤 자카이의 눈물의 호소처럼 우리가 자녀들의 입술과 가슴에 율법을 전수하고 민족의 정체성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울고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나를 이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눅23:28)
교회의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다시 폐허 위에 꽃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위한 기도의 눈물을 뿌려야 할 때입니다. 다음 세대의 믿음 전수를 위해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말씀과 생각 그리고 삶을 나누는 가정성경공부를 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위기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살리는 기회가 될것입니다.